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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기초

애플 창시자, 스티브잡스 명언과 일생 탐구

by NEWLIM 2022.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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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티브잡스가 애플을 창시한 CEO이며, 현재 경영자와 많은 기업인들 마케터들에게 멘토이자 목표로 불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애플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수 있었던 그의 추진력과 창의력은 어디서 나왔으며 그의 일생과 또 배울수 있는점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스티브잡스의 일생

 

스티브잡스는 현재는 부고하였지만 1955년 2월 24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양부모에게 입양되었으며 양부모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미국서부의 농부였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 스티브 잡스를 입양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성인이 되면서 친부모의 존재도 알게되었지만 언제나 그는 친부모에 대해 냉담하게 반응하며, 언제나 양부모를 친부모로 여겼다고 한다. 친부모는 어머니는 대화 치료사, 아버지는 정치학 교수였다고 한다. 

스티브 잡스가 3살이 되었을때 아버지의 직장인 자동자 영업 및 부동산 중계를 따라서 사우스 샌프란시스코의 산업단지에 들어선 주택가로 이주하였고 전자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어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성장하게 된다. 이때 전자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동년대 빌 페르난데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나 교류했으며 이는 스티브 잡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시기에 자신이 입양아라는 것을 알고 방황하고 미국 히피 문화에 젖어서 마약까지도 했다고 하지만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기드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마약을 중단하고 새로운 이상을 찾아 동양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년 안에 학교를 그만두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아타리 라는 전자게임 회사에 취업하게 된다.

컴퓨터 게임을 만드는 시기에 다시 어렸을때 친분이 있었던 스티브 워즈니악과 친분을 쌓았고 그에게 전자 지식과 기술에 대해 다양한 도움을 받았다. 잡스는 사업적인 수완과 마케팅 감각이 뛰어났지만 기술이 상대적으로 부족했었고 이에 워즈니악의 천부적인 전자 엔지니어의 도움이 합쳐지면 좋은 아이디어가 실현 가능하게 되었기에 각각 두사람의 장점을 합쳐서 1976년 컴퓨터를 제조하는 회사를 공동창업을 하게 된다. 이 회사가 바로 지금의 전세계적인 대기업인 애플이다.

 

2. 애플 창업

스티브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가 함께 공동창업한 애플은 한입 배어물은 사과 로고만 보면 알정도로 굉장히 이미지 마케팅에 성공하게 된다. 왜 회사 이름을 애플이라 지었는지에 대해 다양한 설이 있는데 스티브 잡스가 컴퓨터를 만들때 사과를 한입 베어물고 컴퓨터 위에 올려놓았던 것을 상징화 했다는 설이나, 사과가 좋은 의미를 담고 있어서 선택했다는 설 등등이 설로 돌아다니지만 스티브 잡스가 죽은 후 공동 창업자인 워즈니악이 '스티브 잡스가 오리건 주의 선불교 수행을 하던 장소였던 사과농장을 연상하여 애플이라고 지었다'라고 밝힌 적이 있기는 하다.

애플은 회로기판만 있는 퍼스널컴퓨터인 '애플 1'을 만들어 발표했고 퍼스널 컴퓨터 시장이 곧 주목을 받게되자 바로 새로운 컴퓨터 플렛폼인 '애플 2' 를 발표하게 된다. 확장슬롯으로 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획기적인 운영체계를 적용하여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불편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를 통해 컴퓨터로 데크스탑 시장을 개척 했으며, macintosh를 통해 PC열풍을 불러와 대부분의 가정에도 컴퓨터가 보급될수 있도록 만들어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열게 된다. 또한 이어 iphone을 통해 스마트폰이 개인에게 다 보급되도록 하여 오늘날 모바일 시대 또한도 시작되게 된다. 

또한 스티브잡스는 애플의 전반적인 광고전략과 프레젠 테이션도 본인이 다 했는데 독특한 마케팅과 PT기술로 매번 신제품 발표회를 대성공 시키며 신화적인 광고인으로도 유명하다. 이에 프레젠테이션의 귀재라 불리며 새로운 제품을 시장에 소개하는데에 아주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인 발표방식을 쓰며 많은 발표자들에게 귀감을 주고 그의 프레젠테이션을 연구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3. 스티브잡스의 결혼 생활과 자아도취 돌아이 행보

스티브잡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CEO겸 기업가도 맞지만 개인적으로 성격이 많이 난해했다고 한다. 

욕심과 탐욕과 이기주의 등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고 하는데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연인 관계였던 크리스 앤과의 사이에서 리사 라는 딸이 생겼지만 잡스는 인정하지 않았고 월 500달러씩 주는데에 그쳤으며 나는 무정자 증이다 라는 말까지 하면서 회피했지만 정작 자신이 주도했던 프로젝트 이름은 리사 였다. 어찌되었떤 이 리사 프로젝트가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밀려나게 되자 새로운 컴퓨터를 개발하는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다. 이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지만 사용할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얼마가지 않아 판매 속도가 급속하게 줄게 된다. 이에 경영에서 쫓겨나게 되고 애플을 떠난 후 넥스트 회사를 세우고 1986년 조지 루카스 감독으로 부터 픽사를 1000만 달러에 인수하게 된다. 두 기업 모두 수익을 내지 못한채 전전긍긍하다가 픽사의 존 레스터가 감독한 토이스토리의 원형이 되는 틴토이를 만들어 아카데미상 단편 에미메이션상을 수상하며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고 뒤이어 적자에 허덕이며 새로운 운영체계를 원했던 애플이 넥스트 사를 인수하여 스티브잡스가 13년 만에 다시 애플에 복귀하여 경영 컨설턴트로 역할을 하여 4억 달러 흑자를 내는데 공을 세우게 된다. 또한 픽사를 토이스토리의 성공에 맞추어 주식시장에 상장하여 단번에 다시 억만 장자가 되게 된다. 이 픽사는 2006년에 월트 디즈니가 인수하게 되면서 잡스는 월트 디즈니의 이사회 임원이 되게 된다. 

 

4, 아이팟 아이패드 개발로 정점, 사망

애플이 다시 복귀한 스티브 잡스는 2년동안 자본 20억달러에서 160억 달러로 증가하게 회사를 성장시켰으며 음악에 관심을 가져 아이튠즈 개발에 이어 아이팟 이라는 MP3플레이러를 개발하여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게 된다. 

이에 세계적으로 스티브 잡스를 단순한 사업가 기업가가 아닌 세상을 바꾼 인물로 인식하게 되었고 많은 청중들 앞에서 청바지에 검은색 셔츠를 입고 연설하는 모습으로 스티브 잡스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2007년 아이폰이 발표된 후로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으며 2010년 뒤이어 아이패드라는 태블릿 컴퓨터또한 발표하게 되면 변화에 가속도가 붙게 된다. 

스티브 잡스는 IT업계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되며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개인적으로는 희귀암 발병 등 건강 문제에 시달렸다. 2004년 췌장암으로 수술을 받고, 2009년 간(肝) 이식 치료를 받았다. 2011년 8월 24일 병세 악화로 애플 CEO직을 사임했고, 사임 후 2달이 채 지나지 않은 10월 5일에 향년 56세로 사망했다. 사인(死因)은 췌장 신경내분비종양이었다.

5. 명언

매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의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혁신은 리더와 추종자를 구분하는 잣대다.

 

훌륭한 아티스트는 베끼고 위대한 아티스트는 훔친다.(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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